얼마 전, 아내와 아들 정훈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던 길이었다. 옆 차로의 차들은 파란 신호를 받아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우리 차로의 차는 꼼짝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늦기도 해서 마음도 조급한데 차가 움직이질 않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 차는 왜 가질 않는거야? 왜 저러고 서 있어?" 조금 짜증어린 어투로 내가 말을 내 뱉자 뒷 좌석에 앉아있던 아들녀석이 말을 툭 던지는 것이었다. "아빠,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요." 그 말에 겸연쩍기도 해서 "그럴까?" 그래,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저 놈의 속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을까하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의 말대로 앞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경찰차가 그 차로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래, 무슨 일이든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는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일이 있고난 후부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요' 라는 말은 우리 집의 유행어가 되어 버렸다. 아내나 내가 운전하다가 길이 막힌다고 짜증을 내기라도 하면 절로 입에서 튀어 나온다는 말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화 내지마!' 그 말 듣고 화 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늦게 가고 싶어서 일부로 차를 늦게 모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운전이 서툴다든지 아니면 뭔가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결국은 다른 차들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요' 라는 말은 너무나도 여러 군데에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가끔은 아내가 생각지도 않은 일을 해서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고, 내가 원했던 것과는 다른 일을 해서 짜증나게 만들 때도 있다. 그럴 때 머리를 스치는 말이 바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이다. 그 말이 생각났음에도 불구하고 화를 낸다면 오히려 그것이 정상이 아닐게다.

인간사 모든 관계에서 나름대로의 이유는 당연히 존재한다.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고 또 그렇게 말을 한 것일게다. 그렇다면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나와는 생각 차이가 난다고 해서, 내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화를 낸다거나 아니면 짜증을 부리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고 가슴속에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 무슨 일이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보려는 자세와 태도가 우리에게 있기만 한다면 부부간에 얼마만큼 가슴을 연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을까?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이 다가오지 않겠는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눈높이라는 말을 요즘 많이 쓴다. 눈높이라는 말도 결국은 자녀 나름대로의 이유가 무엇인지 먼저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말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에서 자녀를 바라 보려는 태도가 바로 눈높이라는 것이다. 아이가 어느 날 늦게 집에 들어 왔다 하더라도 먼저 야단치려고 하기 보다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만약 나름대로의 이유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그 모든 것을 받아 들이거나 아니면 마음을 연 대화로 나름대로의 이유를 수정해 가야 되질 않을까?

부부들을 상담하면서도 느끼는 것은 갈등이 많은 부부일수록 나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삶의 중심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방은 자신을 위해 채워주는 존재이지 자신이 상대방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나 자신의 욕구만을 채워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생각들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자의 문제점이나 단점이 나의 삶에 불편을 던져주기 때문에 바로 그 점을 불평불만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부갈등의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초점을 자신이 아닌 배우자에게 둔다면 관점이 달라진다. 아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기뻐하는 것은 곧 내가 기뻐하는 것이다라는 부부일체의 생각도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배우자의 인격을 존중해 주기 때문에 건강하게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우며,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 그래서 배우자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다려주기도 하고, 그리고 오히려 용기를 주는 자로 변신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부부라는 존재는 서로가 자기 몸을 다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는 헌신이라고 한다. 헌신이라는 것은 서로가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엎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헌신을 바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헌신해야 한다. 헌신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배우자의 모든 삶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유를 생각하면서 수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가 준비되어 있어야 서로를 위한 순종과 헌신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지금 많은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 덩달아 사회도 흔들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잘남이나 자랑거리가 아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모든 일에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배우자를, 그리고 자녀들을, 더불어 이웃들을 쳐다 보기 시작한다면 평화는 저절로 찾아들게 될 것이다. 우선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신부터 평강이 넘쳐나게 될 것이다. 잊지 말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추부길 목사(한국가정사역 연구소)

[출처: 크리스천투데이]